설교말씀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의 배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가뭄을 끝내고 비를 내리실 것이라는 예언을 아합 왕에게 알리기 위해 엘리야가 가고 지난 3년간 무서운 가뭄의 재앙이 어떤 신이 내린 재앙인지에 대해 엘리야와 아합 왕 간에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450명 간의 결전이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의 결전에 앞서 하나님과 이방신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단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머뭇 머뭇거리지 않고 우리가 결단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21절에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이것인지 저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회색지대, 즉 중간지대란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 가뭄이 3년이나 계속됨에 따라 산천은 메말랐고 가축들은 굶주렸으며 사람마다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됩니다. 세상의 열악한 환경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 두실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조상 때부터 전통적으로 믿어온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없어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면서 하나님이 계실까 안 계실까, 하나님이 참신일까 바알 신이 참신일까 방황하게 된 것입니다. 환경의 기근이 영적 기근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안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 같기도 하고 사단마귀의 종 같기도 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 같기도 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 같기도 하고 이 둘 사이에서 언제까지 머뭇머뭇하려느냐? 결단을 내리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이런 선택의 순간에 어느 쪽을 택하실 것입니까? 이러한 결단의 촉구는 마치 오늘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도전의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물론 잘 한 일도 많았지만 잘못한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안 그러리라.” “이렇게 살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한 바가 있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한 신앙의 결단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선택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왜 선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먼저, 선택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이게 하고 마지막 설교를 했는데 수 24:15절에 보면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가나안 족속의 신들을 섬길 것인지 선택할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죽기도하고 살기도 하며, 전진도 하고 후퇴도 하며, 잘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하며, 어두움에 살기도 하고 광명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오늘 우리의 현재의 삶은 어제 우리가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의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어제 잘못 선택한 결과일 것이고 오늘 고민이 있다면 그것도 어제 잘못 선택한 열매일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의 상태는 과거 선택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적당주의와 타협하려는 모습이 만연해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생명을 걸고 올바른 영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 이 선택은 절대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날 사랑하지만 내대신 성공해 줄 수 없는 것이고 스승이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내 대신 공부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합격의 영광도 내 선택의 결과요 불합격의 창피함도 내 선택의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오래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문안도 있듯이 한번 잘못 선택한 결과로 인해 때로는 1년, 혹은 10년, 아니면 평생토록 쓴 잔을 마셔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단 한번 선악과를 먹는 잘못된 선택했다가 죄의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히말라야 산에 후회 새라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그 새는 낮에는 잠만 자다가 밤이 되어 추우면 슬피 울며 “내일이면 꼭 집을 지으리, 내일이면 꼭 집을 지으리!”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 언제 그랬다는 듯이 또 잠만 잡니다. 그러다가 또 밤이 되면 밤새 떨며 후회하고 아침이 되면 또 잠자고 평생을 그러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낮에 아무리 잠이 온다고 해도 밤에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낮에 죽어라 집을 지어야 하겠는데 선택에 대한 결단력이 부족하기에 평생 후회만 하다 죽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선택을 왜 올바로 하지 못할까요?
    첫째,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선 먹기 좋은 곶감이 단 줄만 알았지, 눈에 보기에 좋으며 그것 택하고, 귀에 듣기 좋으면 그것 택하고 내일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기에 올바른 선택을 못하는 것입니다. 망할 줄 알면서도 망하는 길 택하는 것이 인간이요 인생을 그르칠 줄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둘째, 욕심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심은 마치 아편과 같아서 중독되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아편 중독자는 나쁜 줄 알면서도 집 팔고 논 팔고 심지어 자식과 아내까지 팔아버리고 맙니다. 욕심이라는 것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욕심에 중독된 가룟 유다는 공금이 자기 돈으로 보였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돈으로 보였습니다. 욕심중독증 환자는 나쁜 줄 몰라서 나쁜 짓 하는 거 아니요 좋은 줄 몰라서 선한 일 못하는 것 아닙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선보다 악을, 참보다 거짓을, 의보다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잘못된 줄 알면서도 뻔히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성을 타락한 근성이라고 합니다.

    셋째, 바로 타락한 근성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제 버릇 개 못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몸에 밴 습성은 고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타고난 근성이라는 것도 역시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결심하고 맹세하고 혈서를 쓰고 각서를 수십 번 써도 별 수 없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선택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내 지식,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를 지배할 때 욕심이라는 것은 꼼짝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타락한 근성이 성화 되어지고 무지했던 것이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후회스러운 부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여러 가지 선택의 폭이 있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고전 6:15절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벨리알 같은 사탄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선택해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선택을 놓고 우리를 혼돈하게 만듭니다..

  1. 환경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환경이라 함은 우리 삶 전체를 말합니다. 크게는 정치적 환경, 경제적 환경, 사회적 환경, 작게는 부유한 환경, 가난한 환경, 건강의 환경, 질병의 환경…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 환경을 보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다 훼파되고 대신 우상이 서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고 어느 곳에서도 찬송소리를 들을 수 없고 기도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은 자포자기합니다. “이거 하나님 안 계신 것 아냐? 그냥 아합 왕의 눈치나 보면서, 이세벨의 비위나 맞춰가면서 목숨이나 부지하자.” 이러다가도 “아냐, 그럴 수는 없지. 옛날 우리 조상이 어떻게 출애굽을 했는데. 어떻게 가나안 땅을 정복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이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이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환경이 좋을 때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이 환경에 즐거움을 두고 삽니다. 그러면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 믿어도 별수 없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아냐?” 하며 의심합니다. “자녀를 위해 그토록 매일 기도를 드렸건만, 사업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금식기도 했건만, 건강을 위해, 가족 구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 아무것도 이루어 않으니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안 되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그냥 우리는 하나님 뜻에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은 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자격시험에 떨어질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불어나는 재산, 눈에 보이는 통장잔고, 눈에 보이는 대궐 같은 집, 눈에 보이는 윗자리 이것이 우리의 영혼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을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천국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보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환경이 사막과 같을 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만 계시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사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면 그 가운데 만나가 있고 생수가 있는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있고 밤에는 불기둥이 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인생의 기준이 선명해지고, 삶의 길이 분명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나 하나님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택한 자 중 지금까지 실패한자 없었고 배신당한 자 없었습니다.

    2. 물질이냐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바알 신은 ‘풍요의 신으로 물질적 번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신을 찾는 것입니다. 현실의 고난에서 빨리 빠져나오게 해주는, 효과가 빠른 것을 원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물질이 어려우면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풍요의 신 바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마 6: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 걸치고, 한 입 가지고 찬양도 하고 저주도 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교회에 대하여 원망이나 불평만 늘어놓고 살지 말고, 소돔과 고모라 같은 화려하지만 쾌락과 음란, 타락한 세상을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 머리와 마음에 돈을 꽉 채워놓고 동시에 하나님을 채워놓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주장하면서 종교다원주의가 강력하게 일어나고 기독교가 가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공격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범신론적입니다. 모두 다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절대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과 결코 타협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시며,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것들과 섞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다 섞어버리려고 합니다. 머뭇거리는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속에 꽉 차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을 택했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하나님과의 약속보다 물질을 택하였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질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요 방법일 뿐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실 뿐입니다.

    3. 육체의 즐거움이냐 영혼의 순결이냐? 를 택해야 합니다.
    약 4:4절에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벗이 되어 육신의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은 살찌고 기름진 음식 실컷 먹을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영혼에 때를 묻힐까 봐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사자 굴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다니엘이 망한 것 아닙니다. 육체의 즐거움이냐 영혼의 순결이냐? 우리는 먹지 못할지라도 영혼의 순결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영혼의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한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보디발의 아내의 말을 따랐다면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육체는 고통 당할지 모르지만 영혼에 때를 묻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비장한 신앙에 대한 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까지 내가 선택한 결과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말씀 붙잡고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바른 선택, 바른 판단, 바른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