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화가가 심사숙고 끝에 모델을 정하고 가장 선한 모습을 지닌 분의 모습을 따라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번에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야말로 사단마귀의 얼굴 그 자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 맞는 적당한 모델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룟 유다의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거니와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이 화가는 교도소를 찾아가게 되었고 교도소 소장의 배려로 감방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가룟 유다가 될 만한 얼굴은 죄를 지은 흉악범 중에 있을 것이고 그런 얼굴이라면 중죄인이 있는 감방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감방 저 감방을 간수의 안내로 기웃거리던 이 화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살기 등등한 두 눈빛, 깡마른 얼굴, 고뇌에 찬 얼굴, 그가 찾던 유다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화가는 이 죄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내가 그리려는 가룟 유다의 모델이 되어 줄 수 있겠습니까?” 물끄러미 화가를 바라보던 이 죄수는 한 참 만에 입을 열더니. “화가 선생. 절 몰라보시겠소.” “저를 자세히 보시오. 그 때 예수님의 모델 했던 사람이 바로 나요.” 화가는 두 번째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자기 귀와 눈을 의심했습니다.

한 인간의 선하고 거룩한 생활은 예수님의 모델이 될 수 있었고. 예수님을 떠나 방탕하고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가룟 유다의 모델이 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사로잡혀 살면 내가 주님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마귀의 종 노릇하며 세상의 쾌락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던 삶은 결국 멸망의 길로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유언과 같은 고별 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 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인간은 하나님을 택한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택하여 육신대로 살 것인지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 주간도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선택하심으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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